| 제목 | (설교) 원기 111년 09월 03일 목요예회 설교 (탁혜성_AI시대에 우리는 법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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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탁혜성 |
| 작성일 | 26-09-02 1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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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09.03 목요예회 설교안.hwpx (63.6K) 1회 다운로드 | DATE : 2026-09-02 15:50:03
본문
AI시대에 우리는 법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전제
「옛경전은, 비유하여 말하자면, 이미 지어놓은 옷과 같아서 모든 사람의 몸에 고루 다 맞기가 어려우나 직접 구전 심수로 배우는 것은 그 몸에 맞추어 새 옷을 지어 입는 것과 같아서 옷이 각각 그 몸에 맞으리니」 이상은 대종경 제2 교의품 24장 말씀 중 일부입니다.
유도
여러분은 궁금한 게 있을 때 어떻게 찾으시나요?
예를들어 영광 맛집이 궁금하다. 그러면 저는 네이버 포털 사이트에 ‘영광 맛집’ 이렇게 검색하는데요. 새도반 교우한테 물어봤더니 요즘은 GPT한테 물어본다고 합니다. 이번 상시때 사가에 갔더니 저희 어머니도 GPT한테 ‘옆동네에 새로 빵집에 생겼는데, 손님들이 거기로 많이 갈까?’ 물어보고 있더라고요.
AI는 이렇게 손쉽게 정보를 제공해주지만, 때로는 엉뚱하고 기계적인 대답으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종종 사람간의 대화도 마치 AI와 같이 하고 있지 않은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대화가 점점 AI처럼 바뀌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전개
대종경 교의품 24장을 보면, 주산종사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대종사를 뵈온 후로는 차차 사리에 밝아짐이 있사오나, 알고 보니 전에 보던 그 글이요, 전에 듣던 그 말씀이온데, 어찌하여 모든 것이 새로 알아지는 감이 있사온지 그 이유를 알고자 하나이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하신적 있나요? 어른님께 문답을 드렸는데 머리가 맑아지고 시원해지는 느낌. 저는 그것이 우리 원불교의 문답과 회화의 묘미임을 확신하는 한 사람인데요. 이러한 물음에 대종사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옛경전은, 이미 지어놓은 옷과 같아서 모든 사람의 몸에 고루 다 맞기가 어려우나 직접 구전 심수로 배우는 것은 그 몸에 맞추어 새 옷을 지어 입는 것같이 각각의 몸에 맞으리니.」
백천만건의 경전 지식을 AI가 손쉽게 찾아 줄 수도 있겠으나, 사실 AI는 입력값에 대한 출력만할 뿐, 우리가 느끼는 세세한 감정을 경험 할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 교화자들은 이 고군분투하는 삶 속에서, 각자의 근기와 경우에 맞게 법을 녹이고, 그 경험을 말로, 마음으로, 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바로 지어서 입는 옷,“구전심수”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구전심수(口傳心授).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인데요. 이 구전심수에 대하여 대종사께서는 “각자의 근기와 경우를 따라, 각각 그에 맞는 법으로 마음 기틀을 계발하는 공부가, 어찌 저 고정한 경전만으로 하는 공부에 비할 바이리요”하셨습니다.
전개-2
모든 것이 기록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전심수.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 이 마음과 마음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 고민해보셨나요?
오늘은 어떻게하면 서로의 마음을 연할 수 있을지. 제가 꾸준히 연마하고 있는 방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대화를 ‘정보중심’에서 ‘경험과 감정 중심’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대종경 법문을 잘 보면 그 특징이 있습니다. 산돼지와 포수, 옹기장수와 지게꾼, 노부부와 자부, 이런 법문들은 한번만 읽어도 기억에 남죠. 모두 대종사께서 경험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또한 대종사께서 혼자 웃기도하고 탄식하고, 안타깝기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법문들을 보면서 우리는 내 생활에 접목시켜보고, 공감을 하기도 하죠. 이렇게 대종사님처럼 우리도 법 속에서 살아가는 실제 경험을 세상 사람들에게 건내는 겁니다.
자, 지금부터는 원활한 이해를 위해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예시로 들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에 더 가까운지 보세요.
어떤 사람이 “나 요즘 원불교 좌선법대로 아침에 선한다.”하고 말했어요.
가희는 “요골수립 해야돼. 눈은 뜨고 하지? 5분이라도 매일하는게 좋대.”하고 대답하죠. 어찌보면 틀린말도 없고 유용한 정보일 수 있지만, 이런 대화는 “아, 그렇구나”하고 금방 식어버립니다.
반면, 사라는 같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원불교 좌선법을 시작하게 됐어?”, “눈을 뜨고 선을 하는게 어색하지 않아? 나는 처음에 되게 어색했거든. 근데 눈을 뜨려고 노력하니까, 어느 순간 시각적으로 경계가 와도 좀 덜 흔들리고 단전에 딱 집주하게 되더라.” 이런 류의 답이 나왔을 때는 대화의 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라는 감정과 경험을 나누려고 하고있죠.
자,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고, 이들에게 정보는 이미 넘쳐흐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 대 인간의 대화에서만 얻을 수 있는 「유대감, 취약성, 감정교류」 이런 것들에 훨씬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경험과 감정을 나눌 수 있을 때, 훨씬 더 몰입하게 됩니다. "아 나도 그랬는데!", "아 맞아! 뭔지 알아!" 이런식의 대화말입니다.
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진솔한 경험과 감정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윤기가 통하고 유대감이 형성되면, ‘어? 저 사람은 나랑 비슷한데 왜 단단하지? 저 근간에 뭐가 바탕된 거지?’하는 의문과 함께 자연히 우리 법에 흥미가 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서로 감정과 경험을 나누다보면, 상대방은 어느새 자신의 솔직한 고민과 다듬어지지 않은 이 속마음을 드러내게 되는데요. 이때 제가 유념하려고 노력하는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면접관’이 아니라, ‘캐스팅 디렉터’가 되는 것인데요. 즉, 평가자 모드를 끄고 발굴자 모드를 키자는 거죠.
우리는 은연중에 '저 사람, 범계했네 저거.', '영주 21번 한 거 맞아?',‘좀, 오만방자한데?’ 하면서 마치 ‘면접관’이 된 양 남들을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면접자리, 평가받는 자리에서는 누구든지 긴장하고 자신을 방어하게 마련이죠.
반면 캐스팅 디렉터는 다릅니다. 지금은 비록 원석이고 부족해보여도 그 사람이 가진 잠재력을 발굴해냅니다. 진흙 속 보석을 알아보듯, 내 안의 가치, 불성을 찾아서, 눈앞에 보여주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고심해보고, 또 희망도 가지게 됩니다.
저 역시 추천 교무님께 전무출신을 권유받고 ‘예비교무가 되겠다’ 다짐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수도생활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고치라’고 하신게 아니라, 내 안에 갊아있었으나,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교화자로서의 역량’을 일깨워주셨기 때문에,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리라!’하는 희망으로, 이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특정 조건과 기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하는 데에 천재적인 이 AI. 그러나 AI는 한 인간의 내면 깊이 잠재된 ‘불성’을 알아보고, 그로써 마음을 연하는 이 “불공”의 마음을 결코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천여래 만보살이 출현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를 판단하는 평가자가 아니라, 모두가 가진 거룩한 불성의 빛을 환하게 틔워서, 천여래를 발굴하고 만보살을 나투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 구전심수일 것입니다.
강령
자, AI시대에 우리는 법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 「다시 정법 시대가 오면 새로이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실지로 훈련하여 구전 심수의 정법 아래 사람사람이 그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하나니」 대종경 수행품 22장 말씀입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법 속에서 살아가는 진솔한 경험으로 서로의 마음을 연하고, 불성의 싹을 틔워서 진급의 길로 이끄는 것. 이것이야말로 각자의 몸에 맞게 새로 지어입는 옷, 각자의 마음에 맞는 우리법을 만나게하는 이 시대의 참된 구전심수가 될 것입니다.
다짐.
여러분. 우리는, 마음을 전합시다. 수 없이 쏟아지는 지식과 정보 속에서도 우리는 비워내고 온전함을 찾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 텅 빈 온전함으로, AI로는 대체할 수 없는 우리 불공법을 세상에 펼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 시대를 제대로 마주하여 다 함께 진정한 구전심수로, 교화의 꽃을 피워 봅시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할 구전심수에 대하여, 대산종사님의 법문을 인용하며, 이상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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