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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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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기 109년 3월 7일 목요예회 [고서연_특신급 계문 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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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생
댓글 0건 조회 27회 작성일 24-03-0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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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0307 목요예회 설교 원고

제목 : 총장님의 상태 메시지_항상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 속담에 말하고 다니는 것을 나팔 불고 다닌다고도 하나니, 사람 사람이 다 나팔이 있어 그 나팔을 불되 어떤 곡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어떤 곡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며, 어떤 곡조는 슬프게 하고, 어떤 곡조는 즐겁게 하며, 어떤 곡조는 화합하게 하고, 어떤 곡조는 다투게 하여, 그에 따라 죄와 복의 길이 나누이게 되나니라.] 이상은 대종경 제4 인도품 21장 말씀 중 일부분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깔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마늘도 까야하고, 양파도 까야하고, 계란 껍질도 까야하고, 분리수거 할 때 병뚜껑도 까야 합니다. 이렇게 껍질을 까거나, 벗기고, 들추는 것은 복을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리가 까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타인과입니다. 속된 말로 뒷담화라고 하기도 하고 타인의 과실을 까발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거짓말을 한 번도 안한 사람이 없듯이, 타인의 과실을 말 해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산종사께서는 우리의 입이라는게 구시화복문이라고 하시면서 잘못 쓰면 죄를 불러오는 화문이 되지만 잘 쓰면 복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말로 죄도 짓고 복도 짓는데, 그런 우리를 위해 대종사님께서는 말에 대한 계문으로써 각자 각자의 묵은 습관을 고치고, 악업을 더 이상 짓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말에 대한 조목이 30개 계문 중에 6, 그러니까 5분의 1일 정도로 우린 입으로 죄를 짓기도 하고, 복을 짓기도 합니다.

 

6개 중 하나가 바로 오늘의 설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요, 바로 특신급 계문 2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입니다.

사실은 제가 이 조항을 너무나도 잘 지켜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면 참 좋겠지만 말 공부를 근 3년을 해온 저도 아직도 말에 대한 공부가 힘듭니다. 하루에도 습관적으로 타인과를 하게 되는 순간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함께 말 공부를 해보고자 여러분과 타인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떨 때 타인과를 하게 될까요?

제 경험을 비추어 생각해보면 여러 경우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한 만 볼 때,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싶을 때, 내가 그 과실로 피해를 보았을 때, 상대방을 시기질투 할 때, 상대의 단점만 볼 때 주로 타인과를 하게 되었습니다.

타인과를 했을 때 결과가 좋았다면 대종사님께서 계문에 넣어주지 않으셨겠죠?

타인과를 했을 때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선 타인과를 할 때 일어나는 가장 큰 일은 상극의 기운이 조성되어 그 기운이 곳곳으로 뻗어나간다는 것입니다. 단지 상대의 과실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하고 다니는 행위일지라도 그 행동 하나가 공동 생활을 할 때 상극의 기운을 만들게 되고, 당파를 짓게 되고, 옳다, 그르다 시비논쟁을 하게되어 결국 일도 그르치고, 기운과 마음이 연해지지 못해서 결국 배은행을 하게 되는 지경에 가기도 합니다.

대종사님 당대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인도품 35장에도 밝혀주셨는데요, 하루는 여럿 제자들이 신문을 보면서 이게 옳다, 그르다 하며 시사평론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종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남의 시비를 가벼이 말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에서 선악의 원인과 그 결과 여하를 자상히 살펴 나의 앞 길에 거울 삼는 것이 공부인의 떳떳한 행실이고 참된 이익을 얻는 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리어 날카로운 소견과 가벼운 입을 놀려 사람의 시비 평론하는 재주만 늘어 죄의 구렁에 빠지기 쉽다.”라고 말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극의 기운이 조성되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그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불제중 제생의세의 서원을 세운 공부인들이 모인 우리 학교에서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시비 평론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평론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의 인격까지도 판단하고 헐뜯기도 합니다. 그럴 때 대종사님께서는 인도품 35장에서 그 시비를 자상히 살펴 내 거울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정전 솔성요론에서 밝혀주신 다른 사람의 그릇된 일을 견문하여 자기 그름을 깨치는 공부이고, 잘못된 일을 보고 자기를 살피는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린 타인의 잘잘못을 따져가며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는지 자상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 과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밖으로 향한다면 못마땅한 마음이 가득한 채로 분명 타인과를 하며 상극의 씨앗을 심게 될 것이고, 그 시선을 안으로 돌린다면 그것을 보감삼아 스스로를 점검하고 솔선하는 공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과를 했을 때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은 타인과로 전해지는 말이 나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다르게 전달되어서 사실보다 더 부풀려지거나, 오해의 소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타인과를 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동했다는 뜻이고, 동했을 때는 온전함을 챙기지 못해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입을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 내 위주, 내 시선으로만 생각하게 되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사실은 1만큼의 과실인데도 내 입을 거쳐 나가는 순간 1+@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입을 거치게 되면 1+@+@가 되어 점점 눈덩이 불어나듯 커져가게 됩니다. 그럼 내 입으로 나온 다른 사람의 과실을 듣는 타인은 사실 1만큼의 과실이지만 1 이상으로 부풀려서 알게 되니 더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린 타인의 과실을 보았을 때 어떻게 마음을 챙겨야 할까요? 저는 3가지 방법으로 실천해보았습니다.

 

첫째는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가?‘ 반조하며 시선을 안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 과실을 바라보며 내 모습을 반조해본다면 그것을 보감 삼아 나를 더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또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훅 하고 올라왔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인과의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인과를 쉽게 풀어보자면 내가지은대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천지는 기운이 통해서 그 사람 모르게 미워하고 욕 한 번 한 일이라도 상극의 씨앗이 묻힌다고 인과품에서 밝혀주셨습니다. 인과라는 것은 철저히 내가 지은대로 받는 것이고,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과실을 볼 때에 그 과실의 결과는 그 사람이 받을 것이고, 만약 내가 그 과실을 말하고 다닌다면 그 구업 또한 내가 고스란히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다른 이의 과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제가 새도반으로 들어오고 우리 학교 교우님들과 교수님들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염탐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인산 백인혁 총장님의 상태 메세지가 아직도 제 마음속에 콕 박혀 있습니다. ‘항상 안타까운 마음으로라는 문장이 상태 메시지에 있었는데 처음엔 안타깝다는 마음이 뭔가 싶었지만 공부를 하다보니 부처님께서 어리석은 중생을 바라보실 때, 대종사님께서 공부도 안하고 죄의 구렁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바라보실 때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셨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실을 범한 사람을 미워하고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 하고, 이미 범해진 과실에 대해 타인과를 하며 구업을 짓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내보아야 합니다.

저도 mbti에 얽매이기 싫은데 사람들이 저를 보고 계속 ‘T’라고 하더라고요? 전 반반 섞여있다고 생각하지만...(하하핳) 아무튼, 저는 다른 사람의 과실을 볼 때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비판하고, 팩트폭행을 하는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팩트폭행을 해주길 바라는 상대방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에 대한 공부를 시작 하면서부터는 상대가 과실을 범했을 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상호간의 은혜를 생산해낼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안될 때도 있지만 이렇게 마음 한 번 멈추고 돌려서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을 해보고, 상대에게 내가 도와줄거 없나요?’라고 물어보기만 해도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확 풀어지는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안타까움이란 동정심에서 나온 안타까움이 아닙니다. 함께 진급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움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내면서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고민해보며 상대방이 같은 과실을 범하지 않도록 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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