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원기108년 8월 30일 수요예회(김승찬 “살아 있는 선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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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제목 : 살아 있는 선 공부
강연자 : 김승찬
[석반 후 살림에 대한 일이 있으면 다 마치고 잠 자기 전 남은 시간이나 또는 새벽에 정신을 수양하기 위하여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정전 제 3 수행편 제 2장 정기 훈련과 상시 훈련 제 2절 상시훈련법 1. 상시 응용 주의 사항 5조 말씀입니다. 상시는 우리의 평소 생활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정기 때 익힌 원리를 일상 생활에서 활용하며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 5조에서 밝혀주셨듯이 정기 기간과 마찬가지로 상시 기간에도 잠 자기전 남은 시간과 새벽에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 열불과 좌선을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벌써 새 학기가 시작된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저번 상시 기간에는 단별로 기상 카톡을 올리며 좌선을 점검하였습니다. 카톡을 올려야 하다 보니 내가 집에서도 좌선을 얼마나 챙길 수 있는지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정기 기간 때는 무난하게 챙길 수 있었던 좌선이 혼자 있을 때는 좌선은커녕 아침에 눈 뜨기도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잠자기 전 “내일은 꼭 일어나서 좌선을 챙겨야지.”하고 다짐을 해도 아침이면 쏟아지는 졸음으로 알람 소리조차 듣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새벽에 일어나 좌선을 하고 잠자기 전 염불을 챙기는 것은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상시 때 경험으로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상시 기간, 즉 일상 생활에서 염불과 좌선을 빠짐없이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신 수양에 대한 확실한 원력이 있어야 가능하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내주신 법은 출가자만 실행하는 법이 아닌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천하 만고의 대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 기간에만 훈련하는 것이 아닌 일상 생활에도 실천하도록 상시응용주의사항에서 밝혀주셨습니다. 화려한 물질의 유혹들 속에서 매일같이 수양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정신 수양이 우리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정신 수양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대종경 수행품 13장 말씀을 봉독해드리겠습니다. 대종사 좌선 시간에 선원에 나오시어 대중에게 물으시기를 [그대들이 이와 같이 오는 잠을 참고 좌선을 하고 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 함인가.] 권 동화(權動華) 사뢰기를 [사람의 정신은 원래 온전하고 밝은 것이오나, 욕심의 경계를 따라 천지 만엽으로 흩어져서 온전한 정신을 잃어 버리는 동시에 지혜의 광명이 또한 매(昧)하게 되므로, 일어나는 번뇌를 가라 앉히고 흩어지는 정신을 통일시키어 수양의 힘과 지혜의 광명을 얻기 위함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진실로 수양에 대한 공덕을 안다면 누가 권장하지 아니할지라도 정성이 스스로 계속될 것이나, 한 가지 주의할 일은 그 방법에 대하여 혹 자상히 알지 못하고 그릇 조급한 마음을 내거나 이상한 자취를 구하여 순일한 선법(禪法)을 바로 행하지 못한다면, 공부하는 가운데 혹 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도(邪道)에 흐르기도 하며, 도리어 번뇌가 더 일어나는 수도 있나니, 우리의 좌선법에 자주 대조하고 또는 선진자에게 매양 그 경로를 물어서 공부에 조금도 그릇됨이 없게 하라. 만일 바른 공부를 부지런히 잘 행한다면 쉽게 심신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 모든 부처 모든 성인과 일체 위인이 다 이 선법으로써 그만한 심력을 얻었나니라.]
대종사님께서 진실로 수양에 대한 공덕을 안다면 누가 권하지 아니할지라도 정성이 스스로 계속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벌써 몇 년째 학교에서 좌선과 염불을 하고 있지만 수양의 공덕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하는 좌선이 어느 순간부터는 ‘새벽에 졸린 잠 참아내기’ 혹은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있기’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 반성도 됩니다. 그러나 바른 공부를 부지런히 행한다면 쉽게 심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신 수양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전 제 2 교의편 삼학 중 정신수양의 목적에서는 [천지만엽으로 벌여가는 이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수양을 하자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자주력을 양성한다는 것은 바로 이 “온전한 정신”을 얻는 공부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다보면 보는 것, 듣는 것, 맛 보는 것, 생각하는 것 등으로 우리의 마음이 천지 만엽으로 흩어집니다. 거기에 특별히 욕심 나는 경계가 있다면 내 마음은 완전히 완전히 주착해버리고 본래 온전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는 선 공부는 단지 앉아서만 하는 공부가 아닌 생활에 활용하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전 수행편 무시선법에서는 [만일 앉아야만 선을 하는 것일진대 서는 때는 선을 못하게 될것이니, 앉아서만 하고 서서 못하는 선은 병든 선이라 어찌 중생을 건지는 대법이 되리요, 뿐만 아니라, 성품의 자체가 한갓 공적에만 그친 것이 아니니, 만일 무정물과 같은 선을 닦을진대 이것은 성품을 단련하는 선 공부가 아니요 무용한 병 신을 만드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원불교에서는 정할 때의 선 공부와 실제 생활에서 활용하는 동할 때 선 공부가 함께 병행됩니다. 이 두 가지 선 공부는 서로서로 도움이 되고 바탕이 되는 공부입니다.
정산종사 법어 제 6 경의편 20장에서는 [삼대력 공부는 저축 삼대력 공부와 활용 삼대력 공부가 있나니, 저축 삼대력 공부는 정할 때에 안으로 쌓는 공부요, 활용 삼대력 공부는 동할 때 실지 경계에 사용하는 공부라, 아무리 저축 삼대력 공부를 하였다 할지라도 활용하지 못하면 마치 그늘에 자란 나무 같아서 힘이 없을 것이요, 활용 삼대력 공부 역시 저축 삼대력 공부가 없으면 마치 뿌리 튼튼하지 못한 나무 같아서 힘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항상 저축 삼대력 공부와 활용 삼대력 공부를 병진하여 체용이 겸전하고 동정이 서로 근원하는 원만한 삼대력을 얻을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저축 삼대력 공부와 활용 삼대력 공부가 둘이 아닌 하나로 이어져야 합니다. 제가 상시 때 좌선을 잘 챙기지 못했던 이유는 앉아서 하는 선만 선이고 일상 생활에서 하는 선은 잊어버리고 살았던 까닭일지 모릅니다.
저는 최근에 같은 방을 쓰는 도반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영광 시내에 나갔다가 버스터미널 의자에 핸드폰을 놓고 와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의자에 놓았을 때는 “잊어버리지 않겠지, 이따 까먹지 말자” 하면서 다짐을 했지만 도반들과 잡담을 하며 떠들고 버스가 도착해 분주한 상황에서는 어느새 핸드폰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다짐과는 다르게 매 순간 경계를 따라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죄들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무수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이 선과 악의 가림길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마음의 자주력을 얻지 못하고 온전한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고 살고 있겠습니까.
저는 터미널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던 날을 기점으로 매일 수시로 경계마다 염불하는 것을 유무념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좌선을 할때도 지금 마음 챙기는 것이 동할 때 욕심 경계에서 마음 챙기는 것과 둘이 아닌 것 같다는 감상이 들곤 했습니다. 동할 때 선 공부가 잘되어야 정할 때 선이 잘되고 정할 때 선 공부가 잘되어야 동할 때 선이 잘된다는 원리를 알아서 앉아서만 하는 선 공부가 아니라 동과 정이 하나로 꿰어지는 살아있는 선 공부로써 정진 적공하여 봅시다. 앞으로 저도 심신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 알아가기위한 여정을 계속 해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힘냅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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